우리 삶은 '딸깍'하고 완성되지 않는다
최아영 느린서재 대표모든 것이 ‘딸깍’ 한 번으로 완성되는 세상이다. 생성형 AI가 문장을 짓고, 번역을 하며, 심지어 두꺼운 책 한 권의 개요를 단 3줄로 요약해준다. 이 눈부신 효율의 파도 속에서 역설적으로 ‘느림’을 자처하는 출판사가 있다. ‘느린서재’는 AI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회의 그늘진 목소리를 주목하고 대변한다. 민감하고 불편하며, 결론에 쉽게 다다를 수 없는 이야기들. 그래서 더 천천히 읽히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 책 뒤에 작가와 편집자의 고심이 숨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된 시대. 지은이 이름 옆에 ‘인간’임을 명시해야 할지도 모르는 미래를 앞두고, 느린서재 최아영 대표가 전하는 ‘인간다운’ 책 만들기는 어떤 모습일까.
요즘 AI 관련 투자서나 기술서가 참 많은데, 느린서재에서 출간하는 책들은 여성 서사, 차별, 혐오, 환경문제 등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이야기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성격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기술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차별이나 혐오는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있어요. 제가 지나온 1990년대도, 그리고 2000년대도, 아이들이 살아갈 앞으로의 시간들도 여전히 그럴 거라 생각하면 두려워요. 젠더 갈등이나 세대 갈등은 전보다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극단적으로 치닫는 것 같아요. 게다가 지구는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지고 있어서 어쩌면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생각보다 짧을지도 모르죠.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지금 필요한 건 AI 투자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진짜 일상, 사람들의 갈등에 관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이 주제들은 간결하게 요약할수록 맥락이나 의미가 왜곡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이런 지점에서 아무리 AI가 고도화되더라도 단순화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보나요?
정보를 많이 알고, 더 빠르게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겠죠. 그러나 사회 갈등, 사람들의 복잡한 마음 같은 것들은 AI가 아는 척할 수는 있어도 그 속의 진실까지는 파악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느린서재는 더욱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어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과 그 속의 알맹이에 대해서요.
요즘 출판계에서는 AI를 ‘기술 혁신’이라기보다 ‘신뢰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선이 늘고 있어요. 앞으로 출판업계에서 가장 중요해질 기준이 무엇이라고 보나요?
AI로 번역을 하고 AI가 원고를 대신 써주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어요. 자료 조사도 전부 AI가 하죠. 전체 원고를 AI에게 맡긴 뒤 자신이 쓴 원고라고 우기는 저자도 있었다고 후배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원고를 쓰는 과정에서 AI에게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글을 자기가 썼다고 속일 수는 없어요. 독자가 알고 싶은 건 AI가 대신 써준 글이 아니라 저자의 진짜 생각일 거예요. 앞으로 글이든 그림이든 번역이든 사람이 직접 했다는 건, 엄청 희귀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지은이를 ‘인간 ○○○’라고 명시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죠.
생성형 AI로 원고를 만들고 빠르게 출간하는 이른바 ‘딸깍 도서’ 논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더 빠르고, 더 많이 만드는 방식이 가능한 시대에 느린서재는 어떤 방식으로 책을 만들고 싶나요?
2025년 한 중학교에서 일일 특강을 했는데, 한 학생이 질문하더라고요. 교정도 편집도 전부 AI가 할 수 있지 않냐고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기술이 더 발전하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저는 저자를 섭외하고, 같이 아이디어를 나누고, 목차를 구성하는 일까지 직접 하고 싶어요. 출판사들이 AI를 이용해서 책을 만들면 간편하고 간단할 수는 있겠지만, 그 책에서 사람만의 결이, 그 출판사만의 결이 느껴질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어요. 느린서재 책을 읽는 독자가 편집자의 결을 느낄 수 있게, 그렇게 책을 만들어가고 싶어요. 책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게요.
책을 만들면서 ‘이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느낀 순간이 있다면요?
한번은 ‘챗지피티'에게 느린서재 책 중 한 권을 요약해달라고 했어요. 5~6줄 정도로요. 그런데 아무리 여러 번 다시 해도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초고부터 퇴고, 그리고 고심해서 목차를 만드는 과정까지 적어도 원고를 열 번 이상 본 편집자보다 AI가 책 내용을 더 잘 알까요?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요? 책에서 집중해 읽어야 하는 부분, 책의 뒷이야기 같은 것은 만든 편집자가 더 잘 알 수밖에 없죠. 그래서 메인 카피를 비롯해 책의 보도자료를 쓰는 일까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부 제가 직접 하고 있어요.

느린서재는 매번 ‘지금 꼭 이 책이어야 하는가’를 많이 고민하는 출판사 같습니다.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나 질문이 있다면요?
‘느리게 읽고 가득히 채워지는 책’을 느린서재의 모토로 삼고 있어요. 모두가 내려고 하는 투자서나 자기계발서를 굳이 느린서재까지 출간해야 하나 싶어요. 그보다 조금은 민감하고 불편한 이야기를 내려고 해요. 불편하지만 알아야 할 이야기들이요. “느린서재니까 이런 책들을 낼 수 있지”라는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듣고 싶어요. 그리고 그걸 알아주는 독자들을 만나면 힘이 나요.
책의 내용뿐 아니라 ‘누가,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일은 AI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처럼 느껴집니다. <무정한 글쓰기>를 큰글자도서와 오디오북으로 제작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큰글자도서는 오래전부터 꼭 만들고 싶었던 형식이에요. 작은 글자가 독서의 장벽이 되는 시니어 독자가 많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거든요. 더불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25년 오디오북 지원 사업에 «잊혀지지 않을 권리»가 선정돼 오디오북 제작을 진행했어요. 장애가 독서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고, 책은 공공의 자료이기에 누구나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은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공의 지혜니까요.
AI가 만든 콘텐츠와 인간이 만든 콘텐츠가 같은 유통망에서 소비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출판계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독자들에게 피로감을 주지 않아야 해요.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포장해서 계속 출판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또한 독자를 기망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되고요. 최근에는 베스트셀러 표지를 대놓고 카피하는 일이 빈번해요. 그런 표지는 유행에 묻어갈 수는 있어도 결국엔 독자들을 실망시키게 될 거예요. ‘따라 하기’로 잠깐의 이익을 얻을 수는 있어도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죠.
앞으로 독자들이 책을 고를 때 내용뿐 아니라 ‘누가 썼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중요하게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변화가 출판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결국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남겠죠. 긴 시간 공을 들인 기획, 4~5년에 걸쳐서 작성한 원고처럼요. 이런 책들이 고유성을 갖게 될 거라 생각해요. 시간이 갈수록 ‘진짜’를 가리는 독자들의 안목이 더 중요해지지 않을까요.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느린서재는 독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남기고 싶은가요?
‘책을 왜 읽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매일 합니다. 유튜브에서 정보와 재미를 얻을 수 있고, 시간을 절약해주는 AI가 있는데 말이죠. 재미를 위해서나 배움을 위해서 책을 읽는 시대는 아닌 것 같아요. 결국 나를 불편하게 하는 책, 나를 변하게 하는 책,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책이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책들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의 약점과 모순을 들여다보는 책, 그런 책들을 지치지 않고 만들고 싶어요. 책이 이 세상에 나오는 과정을 떠올려보면, 첫 아이디어 단계에서 출간까지 적어도 열 사람이 관여해요. 저자, 편집자, 디자이너, 인쇄소, 물류 창고, 서점까지 수많은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보이기 위해 오늘도 분투 중이죠. 책 한 권을 마주할 때, 그 사람들의 얼굴이 자연히 떠올랐으면 좋겠다고 매일 생각합니다.
AI가 언젠가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워 보이는’ 순간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인간다움’은 무엇이라고 보나요?
실제로 저는 사람에게 받는 것보다 더 사람다운 위로를 AI에게 받은 적이 있어요. 순간 감동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어요. 언제나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인간처럼 위로해주는 AI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더 멀리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이 경험 이후로 AI와 대화하기가 꺼려지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간단한 자료 정리나 짧은 번역 등이 아니면 AI와 무언가를 상의하지 않아요. 제가 끝까지 갖고 가고 싶은 인간다움은 타인을 위해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나 내 옆의 자리, 조금의 틈 같은 것이에요. 합리적 선택과 가성비가 나오는 선택이 A일 때, 어떤 인간은 그 A 대신 B로 나아가죠. 누군가가 바보 같은 선택이라고 말할 때 그 길을 기쁘고 즐겁게 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이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조금씩 나누려는 마음, 나누고도 후회하지 않는 마음, 보상을 바라지 않는 마음. 돈을 많이 받을수록 더 좋은 자료를 제공하는 AI와 인간이 다른 건 그런 마음 아닐까싶어요.
앞으로 꼭 한 번 깊이 다뤄보고 싶은 주제나 이야기가 있다면요?
쉬이 휘발되지 않는 책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2026년에 만든 책이 2030년에 읽어도 낡은 생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려면 기획도 천천히, 원고 집필도 천천히 하면서 그렇게 오랜 시간 여유를 가지고 책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다큐멘터리 같은 형식으로 기후위기 문제를 오랜 시간 추적해서 만들고 싶기도 하고요. 또 청소년들이 두고두고 읽으면 좋을 인권 시리즈도 기획해보고 싶어요. 그러려면 제 마음과 시간이 쫓기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할 것 같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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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오한별
Photographer 박나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