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만 담을 수 있는 진짜 이야기


김가람 KBS 교양 다큐멘터리 PD

진짜와 가짜는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아마도 인간이 서로 대화하고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순간부터가 아닐까. 다큐멘터리 PD는 이 오랜 질문을 좇아 매일 세상으로 향한다.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몸소 체득한 진실만을 화면 속으로 옮기겠다는 다짐과 함께.




소들이 산처럼 쌓인 헌 옷 더미 위에서 풀 대신 그 옷들을 질겅질겅 씹고 있던 모습.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를 만큼 강렬한 충격이었다.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를 연출한 김가람 PD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반드시 지키는 기준이 있다고 했다. 시각적으로 잔상이 오래 남을 것. 그래서 시청자의 마음에 울림을 줄 수 있을 것. 환경문제에 무관심한 사람들의 마음까지 움직일 수 있는 건 늘 현장에서 담아 온 진짜 기록 덕분이다. 잘 쓰인 프롬프트와 수십 번의 클릭 대신 늘 현장을 궁금해하는 15년 차 다큐멘터리 PD. AI가 그럴듯한 결과물을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시대에도 그의 카메라는 오직 실재하는 것들을 찍고 있다.


대표작 중 하나인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환경과 관련한 다큐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생로병사의 비밀>을 만들면서 처음 환경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어요. 코로나19 초기, 병원 출입이 불가능했기에 다른 장소에서 건강과 관련된 주제를 찾아야 했거든요. 그때 ‘암 마을’이라 불리는 암 집단 발병 지역이 여러 곳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마을들을 조사하면서 공통적으로 환경문제가 있다는 것도 확인했고요. 환경이 사람의 수명과 건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걸 목도하게 됐죠. 그때부터 환경 다큐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환경문제와 관련한 해외 사례나 방대한 자료를 직접 확인해야 할 텐데, 그 과정에서 AI의 도움을 받기도 하나요?

환경 다큐를 제작하다 보면 해외 사례를 다루는 일이 많아요. 소송 문서나 판결문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자료를 직접 확인해야 하고요. 예를 들어 콩고민주공화국의 코발트 채굴 문제를 다룰 때는 미국 인권 변호사가 글로벌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아동 노동과 관련 소송 자료를 직접 봐야 했어요.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영어 법조문이었죠. AI가 없었다면 솔직히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단순 번역뿐 아니라 어려운 법적 쟁점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주기도 해서 도움이 많이 됐죠.

 

그럼 AI가 방송 제작 환경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죠. 예전에는 머릿속 이미지를 설명하려면 이미 나와 있는 레퍼런스를 끝없이 찾아야 했는데, 이제는 AI를 활용해 세상에 없는 이미지를 먼저 만들 수도 있어요. PD와 디자이너가 그 이미지를 보면서 대화를 시작할 수도 있고요. 훨씬 독창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죠. 하지만 다큐멘터리 제작에서만큼은 여전히 조심스러워요. AI로 만든 영상은 티가 나기도 하고, 무엇보다 실재를 대체할 수는 없으니까요. 대규모 전투 장면이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보여줘야 할 때는 유용한 편이고요.

 

헌 옷이 쌓여 있는 집하장

앞으로 AI의 능력이 더 높아진다는 전제 아래 다큐 제작에 AI를 어느 정도 활용할 것 같나요?

솔직히 AI가 아무리 더 정교해진다고 해도 저는 크게 의지할 것 같지 않아요. 다큐멘터리는 자료 조사부터 촬영까지 사람이 전부 확인하고 만들어야 하는 장르거든요. 오히려 AI를 활용하면서 늘어나는 건 검수 부담일 거예요. 예를 들어, 요즘 해외 시위나 사건 사진을 보면 AI가 만들어낸 그럴싸한 가짜가 많아요. 자료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하려면 교차 검증, 맥락 이해, 플랫폼과 제작자 분석까지 직접 해야 하는데, AI가 그걸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AI를 다큐 제작에 활용한다면, PD의 역할과 책임이 더욱 막중해지겠네요.

맞아요. AI가 최종 판단의 책임까지 질 수는 없으니까요. PD는 기획과 설계를 맡는 프로듀서의 역할과 현장에서 계획을 실행하고 완성하는 디렉터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사람이에요. 만약 AI가 이 역할을 하려면 현장에 있는 모든 인력도 AI여야 하겠죠. 결국 최종 책임을 사람이 진다는 점에서 AI의 한계는 명확하다고 봐요.

 

그렇다면 AI의 발전이 오히려 능력 있는 사람을 가려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AI 시대가 오면서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을 가려내는 기준이 더 명확해졌다고 봐요. 한두 해 전만 해도 기획안 작성 능력, 자료 정리 능력이 굉장히 중요했지만 이제는 AI 덕분에 누구나 훌륭한 제작 기획안을 만들 수 있어요. 이제 PD에게는 현장에 나가 프로그램을 완성해내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진 것 같아요. 팀원들을 다독이고, 돌발 상황에 대처하고, 촬영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치 있는 PD로 평가받는 거죠.

 

라트비아의 소수민족 마을

혹시 개인적으로는 AI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나요?

AI 덕분에 일상 시간에도 변화가 있는지 궁금해요. 저는 업무 특성상 하루 종일 영상과 전자 장비 같은 디지털 환경에 노출돼 있다 보니, 일상에서는 오히려 자극적이지 않은 것들을 선택하려고 해요. 책을 읽거나 걷는 시간이 그런 것들이죠. 유튜브 앱도 설치하지 않았어요.(웃음) AI 역시 비슷해요. 번역이나 문서 정리처럼 개인적인 일을 할 때 꼭 필요한 정도만 사용하려고 해요. AI를 최소한으로 활용하면서 시간을 번다고 느끼는 쪽에 가까워요. 그렇게 확보한 시간은 거의 책 작업에 쓰고 있고요. 다큐멘터리 <아이를 위한 지구는 없다>와 연결된 내용의 책이에요. 예전 같았으면 해외 법조문이나 판결문을 직접 읽고 번역해서 글로 풀어낸다는 건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일이라 막막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주 수월해졌어요. 법정에서 어떤 다툼이 있었고, 왜 그런 판결이 나오게 됐는지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됐거든요. 번역가 없이도 가능한 작업이 된 것도 편하고요.

 

올해 1월 22일부터 인공지능기본법이 시행된다고 들었어요. AI 시스템의 신뢰성을 높이는 법적 기준이 마련되었는데, 방송 제작 현장에서도 달라지는 점이 있을까요?

국가에서 공표한 AI 관련 법과 가이드라인을 참고해 내부 기준을 만들고 있어요. 그중 대표적인 것이 AI가 생성한 자료는 반드시 표기하고, 완전히 사실을 대체하는 영상 제작은 제한하는 거예요. AI를 활용한 재연 화면에는 반드시 ‘AI 재연’이라고 표기해 시청자가 혼동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요.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정보 전달을 돕는 보조적 도구로만 활용하는 것이 원칙이에요. 세상이 바뀌니까 법도, 방송 기준도 달라지고 있어요. 그 범위 안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AI를 활용하는 게 중요해졌죠.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윤리 기준이 생겼다고 봐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나요?

촬영차 순천 갯벌에 갔다가 40년 동안 게를 잡으며 살아온 할머니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요. 그분의 단단한 손과 목소리를 마주한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요. 제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다면 절대 만날 수 없는 분이니까요. 그 외에도 나이지리아, 홍콩, 멕시코 등 낯선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언어와 문화는 다르지만 직접 마주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공감이 있거든요. 그런 순간순간이 모두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에요.

 

아이들이 전자 폐기물 위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나이지리아

지구 반대편의 상황을 단 몇 초 만에 알 수 있고, 셀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AI가 계산해주는 시대예요. 그럼에도 PD라는 직업은 늘 현장으로 향하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군요.

AI가 아무리 훌륭해도 실제 현장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설득하는 일은 사람만 할 수 있잖아요.(웃음) 예를 들어, 두부 공장에서 다큐를 찍을 때 두부만 촬영한다면 아마 AI가 재능을 마구 뽐낼 거예요. 하지만 무뚝뚝한 두부 공장 사장님을 웃는 얼굴로 설득한 끝에 갓 나온 따끈따끈한 두부 한 모를 잘라 맛보는 걸 허락받는 일은 AI가 할 수 없겠죠?

 

사람 간의 신뢰는 때로 비효율적인 과정에서 생겨나기도 하는 거네요. 현장에 나가야만 확인하게 되는 진실도 있을 테고요.

AI가 정리해준 알고리즘에 따라 개인의 관심사 위주로 보고 듣고 판단하는 세상이 됐어요. 다큐 PD는 이런 상황에서도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하고, 때로는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겠다’고 느낀 사람과도 대화해야 하죠. 그런데 신기한 건 실제로 만나보면 언제나 공감 지점을 발견해요. 촬영 과정에서 겪는 가욋일도 이런 경험의 일부고요. 경기도 외곽 폐기물 처리 현장을 촬영하던 날, 공휴일임에도 외국인 근로자들이 출근한 모습을 보고 그동안 몰랐던 사회의 또 다른 얼굴을 확인했죠. 뉴스나 자료로만 접했다면 결코 알 수 없는 현장이었어요.

 

AI 시대, 다큐멘터리의 보루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여러 번 강조하는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어떤 현장이든 직접 찾아가는 자세예요. 프로그램의 진실성과 독창성은 실제 마주한 곳에서 나오거든요. 현지의 미묘한 감정이나 복잡한 상황은 절대 AI로 구현할 수 없어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물 분쟁에 대해 알리고 싶다면 직접 현장으로 뛰어가야 해요. 열흘이면 열흘 치의 진실을, 100일이면 100일 치의 진실을 체득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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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제민주

Photographer 박나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