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의 경계를 넘어서
30년 한식 명장 이금희

주방에 여성이 들어오기만 해도 시선이 쏠리던 시절, 이금희 셰프는 불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던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냈다. 조리업계의 치열한 경쟁과 성차별, 보이지 않는 견제의 긴 과정을 통과한 끝에 그는 2016년 메이필드호텔 한식당의 여성 최초 총주방장으로 임명됐다. ‘국내 최초 5성 호텔 여성 총주방장’이라는 타이틀은 그 긴 시간의 무게를 보여주는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궁중 요리와 반가 음식, 전통 한식을 기반으로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지켜온 그는 빠른 변화보다 오래 남는 방식을 선택했다. ‘봉래헌’의 장이 익어가는 시간, ‘낙원’의 단골이 세대를 넘어 다시 찾는 시간, 그리고 주방이 굴러가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의 리듬까지. 이금희 셰프는 그 보이지 않는 시간을 가늠하며 오늘날 메이필드호텔 한식의 정갈한 기준을 만들어왔다.
남성 중심의 위계가 엄격해 여성이 불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했던 시절과 지금의 주방은 어떻게 다른가요?
그때의 주방은 무척 엄격하고 위계도 분명했지만, 여성이 워낙 드물다 보니 한편으로는 신기해하고 챙겨주려는 분위기도 있었어요. 일하는 동료라기보다는 ‘여자가 주방에 있다’는 호기심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지금과 비교하면 오히려 인간적인 면모나 정서적인 여유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요즘은 훨씬 사무적이고, 남녀가 동등하다는 인식이 분명해진 대신 감정을 드러내는 데는 더 조심스러워졌죠. 여성으로서 쉽게 지지 않겠다는 태도도 분명히 생긴 것 같고, 그에 대해 남성들 사이에서는 ‘역차별’이라는 말이 오가기도 해요. 그런 공방 자체가 시대가 변했다는 증거겠죠.

시대가 변한 만큼 여성 셰프들의 활약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이 흐름을 어떻게 바라보나요?
여자 요리사들이 예전보다 훨씬 당당해졌어요. 남자들보다 체력도 좋고,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데도 주저함이 없죠. 사실 현장에서는 남녀 비율이 5 대 5 정도인데, 오히려 요즘은 여자 쪽 기세가 더 세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예전처럼 뒤로 숨거나 눈치 보는 분위기가 아니라, 필요한 말은 분명하게 하고 일도 똑떨어지게 해냅니다. 무엇보다 보기 좋은 건 차별을 의식하지 않는 태도예요. 남자 파트에 섞여 있어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자기 몫을 해내고, 그러면 주변에서도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되죠.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주방에서는 오히려 여자들이 더 크게 웃고, 현장 분위기를 주도하기도 해요. 예전처럼 남자가 앞서고 여자가 따라가는 구조가 아니라 각자 자기 자리에서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느낌이랄까요. 저는 그런 변화가 너무 반갑고, 자기 몫을 잘하면 어깨를 두드려주고 격려하는 편이에요.
‘국내 최초 5성 호텔 여성 총주방장’이라는 상징적인 타이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편견과 한계 앞에서 지금까지 일을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요?
음식이 완성되는 순간의 기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선배들과 찬모 아주머니들이 건네주는 따뜻한 마음이 큰 힘이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언젠가는 나도 후배들에게 받은 걸 그대로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실제로 직원이 임신이나 출산으로 자리를 비울 때도 인원이 빠듯하지만 그 자리를 지켜주려고 했어요. 어떤 사명감이라기보다는 누군가는 중심이 되어 버텨줘야 조직이 굴러간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기 때문이에요. 돌아보면 저 역시 그렇게 지켜보고 끌어준 선배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죠. 임신했을 때 “예쁜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어야 한다”며 예쁜 과일을 챙겨주시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 있어요.
정통 궁중 음식의 봉래헌과 42년 전통의 갈비 명가 낙원의 총괄셰프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 있다면요?
사실 저는 일보다도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요. ‘됨됨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기준이 분명하다 보니 두 식당 모두 이직률이 낮은 편이에요. 봉래헌은 1년 이직률이 10%도 되지 않고, 어떤 해에는 인원 이동이 거의 없기도 해요. 낙원도 마찬가지고요. 호텔 주방은 혼자서는 절대 돌아가지 않는 구조예요. 부서 간 협업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주방 안에서 팀워크가 무너지면 어떤 일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죠. 영업시간에는 모두가 빠르게 움직이고, 위험한 상황도 많기 때문에 팀워크는 선택이 아니라 기본 조건이라고 생각해요.

봉래헌과 낙원은 성격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업장이에요. 이렇게 다른 팀들을 동시에 이끌면서 어우르는 운영 방식이 있나요?
낙원은 비교적 조용하고 지시를 잘 받아들이는 대신 표현이 적은 편이에요. 반면 봉래헌은 말도 많고 부딪히기도 하는데, 결과물은 확실하게 나와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에너지가 살아 있는 거죠. 이 두 가지를 모두 유지하는 것이 사실 가장 어려워요. 그래서 아예 직원들을 한쪽에 고정시키기보다는 업장을 오가며 일해보게 해요. 2~3개월씩 자리를 바꾸다 보면 신기하게도 각 업장의 분위기가 조금씩 스며들어요. 쉽게 바뀌지는 않지만, 분명 영향을 주더라고요. 결국 업장의 분위기는 그곳을 이끄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조용한 리더 아래에서는 조용한 팀이 만들어지고, 활동적인 리더 아래에서는 에너지가 살아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봉래헌처럼 유연하면서도 안정된 분위기를 좋아해서 그 방향으로 가려고 계속 시도하고 있어요.
봉래헌은 15년 넘게 직접 씨간장을 담그고 있다고요. 효율과 속도가 중요한 시대에 이렇게 느린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결국은 맛이죠. 요즘은 좋은 간장도 많고, 저희도 시판 간장을 아예 쓰지 않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직접 담근 간장이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면 맛의 깊이가 완전히 달라져요. 나물을 무칠 때도 그 차이는 분명하고요. 그건 직접 먹어본 사람만 알 수 있어요. 간장을 따로 홍보한 적은 없지만, 맛을 알아본 분들이 먼저 반응해주었고, 입소문으로 조금씩 알려지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왔어요. 봉래헌의 기본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은 직접 하자’예요. 주어진 환경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계속 고민해온 결과죠. 처음부터 계획된 기준이라기보다는, 전통 음식을 하며 재료를 마주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방향에 가까워요.
낙원과 봉래헌 모두 오랜 단골이 많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은 맛을 내야 하는 업장을 운영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디테일은 무엇인가요?
저는 일하는 사람이 바뀌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 사람의 색깔이 20년, 30년, 40년 쌓여가는 것 자체가 곧 그 집의 맛이 되거든요. 봄에 가면 이 음식을 먹었고, 여름에는 저 음식을 먹었다는 기억도 결국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거고요.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 손님이 “예전이랑 똑같네” “주방장 아직도 안 바뀌었어?”라고 물을 때 우리를 신뢰한다고 느껴요. 새로 만들고 바꾸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같은 기준을 오래 지키는 일은 정말 어렵잖아요.
그렇게 오랜 세월 단골의 신뢰를 쌓아온 식당일수록 셰프의 감각이 더 중요할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셰프의 일에는 노력으로는 채울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음식의 간을 보고 맞추는 일은 어느 정도 타고난 감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후배들을 지켜보면서 확신하게 됐죠. 기초적인 준비까지는 누구나 노력만으로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맛을 책임지고 가르쳐야 하는 위치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맛을 알아야 판단하고 다음 단계를 제시할 수 있거든요. 아무리 지적하고 연습을 시켜도 끝내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건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한계라고 할 수 있죠.

전통을 지키는 일과 새로운 흐름을 읽는 것 사이에서 고민도 많을 텐데, 지금 시대에 가장 세련된 한식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한식은 양식과 달리 담음새를 인위적으로 꾸밀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오히려 봉긋하게 담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더 예쁘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담음새에 대한 고민은 늘 하지만, 필요 없는 가니시를 얹는 방식에는 조심스러워요. 한식은 군더더기를 덜어낼수록 더 아름답죠. 고명 역시 장식보다 누군가를 위해 정성껏 준비했다는 의미로 존재하는 거고요. 그래서 저는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이나 틀을 크게 바꾸고 싶지는 않아요. 전통을 고집한다기보다는 이 방식이 가장 우리다운 세련됨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후배들이 기술 외에 어떤 태도를 배우길 바라나요?
요즘은 전통적인 과정을 힘들어하고 아예 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많죠. 그런데 저는 ‘할 줄 알면서 하지 않는 것’과 ‘몰라서 하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타협하는 건 선택이지만, 기본을 모른 채 넘어가는 건 전혀 다른 문제거든요. 그래서 이곳을 거쳐간 후배라면 적어도 우리 음식의 기본만큼은 몸에 새겼으면 해요. 그 위에서 무엇을 선택하든,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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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유승현, 김희성, 오한별, 권아름
Photographer 박나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