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다운 여가
연차를 모아 일 년에 한두 번 떠나는 장기 휴가 대신 평범한 주말을 잘 보내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여긴 꼭 가야 해’라는 남들의 여행 공식을 따르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능동적으로 여가를 즐기는 요즘 사람들.
황엄지 주말토리 대표
무심코 흘려보내기 쉬운 주말을 나를 채우는 시간으로 바꿔주는 여가 큐레이션 플랫폼 ‘주말토리’ 황엄지 대표에게 주말을 보내는 새로운 방법에 대해 물었다.

┃주말토리는 직장을 다니며 사이드 프로젝트로 발행하던 뉴스레터 ‘주말랭이’에서 시작됐죠. 당시 어떤 시기를 보내고 있었나요?
2020년에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일과 일상의 경계가 무너지던 시기였어요. 저 역시 번아웃과 무기력을 겪으면서 주말에는 도파민에 찌든 삶을 살고 있었죠. 문득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를 환기할 수 있는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해보고 싶었어요. 그러다 ‘주말에 뭐 하지?’라는 주제로 콘텐츠를 발행하기 시작했죠. 주말을 조금 더 잘 보내고 싶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싶었어요.
┃주말을 잘 보내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아요. 피곤하고 귀찮아 그냥 흘려보내게 될 때가 많죠. 좋은 주말은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나요?
스스로 만족하고 죄책감이 없는 주말이요. 하루 종일 넷플릭스를 봤더라도 ‘주말을 날려버렸다’는 허탈감이 들지 않고 ‘정말 제대로 충전했다’고 느낀다면 그것 역시 좋은 주말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내 의지라고 할 수 있어요. ‘이번 주말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넷플릭스만 볼 거야’라고 스스로 선택해서 보는 것과,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TV를 켜놓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는 건 확실히 다르니까요. 그래서 주말이 되면 시간을 어떻게 주도적으로 보낼지를 생각하는 편이에요.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내 의지로 선택한 시간이기 때문에 아쉬움이 덜하더라고요. 주체성이 죄책감을 줄여주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는 저 역시 죄책감 가득한 주말을 보낼 때가 많지만요.(웃음)
┃주말토리를 운영하며 가장 크게 체감한 변화가 있다면요?
크게 두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는 여가를 보내는 방식이 능동적으로 변했다는 것이에요. 2020년 이전에는 여가라고 하면 전시, 영화, 공연 같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형태가 많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집에서도 얼마든지 원하는 콘텐츠를 향유할 수 있다 보니 밖에 나가서는 단순히 관람하는 것을 넘어 내가 좋아하는 관심사를 더 깊이 파고들거나, 가보지 않은 소도시를 직접 탐방하고 개척하는 식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두 번째는 여가의 개념이 바뀌었어요. 뉴스레터를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주말에는 친구를 만나거나 집에서 쉬고, 돈과 연차를 모아서 길게 해외여행을 가는 개념으로 여겼어요. 그런데 지금은 일상 속에서 ‘작은 여가’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실제 검색 데이터에서도 그런 변화가 보이나요?
뉴스레터를 매주 발행하고 홈페이지도 운영하다 보니 데이터를 관찰하게 되는데, 요즘 흥미로운 트렌드가 눈에 띄어요. ‘엄마랑’처럼 동행자를 목적지와 함께 검색하는 사람들이 늘었어요. 누구와 가느냐에 따라 여행의 목적이 달라지잖아요. ‘반차’ ‘연차’ ‘1시간’ ‘근교’ 같은 검색어도 눈에 띄고요. 예전에는 연차를 모아서 한 번에 멀리 떠났다면, 지금은 1박 2일로 소도시를 다녀오거나 평일에 반차를 내서 여유롭게 전시를 즐기는 식의 문화가 생겼어요. 굉장히 실리적이죠.
┃요즘 여름휴가, 겨울휴가라는 개념보다 틈틈이 여가를 즐기려는 경향이 강해졌어요. 휴가를 보내는 방식이 달라진 이유가 있을까요?
여러 가지가 겹쳐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여행 자체가 특별했어요. 안 가본 곳이 많았고 정보도 적었죠. 게다가 여행이 ‘보상’이라는 개념도 강했고요. 예전에는 친구가 스위스에 간다고 하면 정말 부러웠는데, 지금은 누구나 SNS나 여행 프로그램을 통해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잖아요. 또 고물가 시대라는 경제적인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결국 사람들이 좀 더 합리적인 선택, 그리고 지속 가능한 행복을 찾게 된 거죠. 게다가 과거에는 긴 휴가나 여행을 ‘밤낮없이 일한 나에게 이 정도 보상을 해줄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오늘과 내일을 희생해 훗날 한 방의 보상을 누리기보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내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봐요. 여가가 생활의 일부이자 자신을 찾아가는 시간이 되어가고 있죠. 또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면서 미래가 불확실해진 시대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주말토리에서 특히 빠르게 감지한 여가 트렌드가 있다면요?
요즘 소도시 여행이 트렌드이지만, 저희는 지난해 초부터 이미 감지했어요. 미디어에서 소도시 여행을 크게 다루지 않는 시기였는데, 소도시 콘텐츠를 발행하거나 관련 상품을 판매하면 굉장히 빠르게 반응이 왔어요. 웰니스도 마찬가지예요. 1인용 사우나나 핀란드식 사우나를 큐레이션해서 판매했는데, 완판될 정도로 반응이 좋았어요. 이후 사우나 열풍이 불었죠.
┃또 다른 재미있는 여가 트렌드가 궁금해요.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비과학적인 것에 기대는 현상이 나타나요. 개운을 위해 산에 간다거나, 돈복이 들어오는 명당 같은 콘텐츠의 반응이 굉장히 좋아요. AI가 등장하고 미래가 불확실해지며 사람들이 운처럼 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에서 재미와 위안을 찾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이 최근 여가 트렌드에서 흥미롭게 느껴지는 지점이에요. 또 하나는 미감을 키우고 싶어 하는 욕구예요. 단순히 분위기 좋은 카페나 유명한 전시가 아니라 ‘미감을 충전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거죠. 아트 북 서점이나 인테리어 회사가 운영하는 공간, 미적 감각을 자극하는 전시 같은 콘텐츠에 대한 반응이 확실히 좋아졌어요. 작년과 비교하면 ‘그냥 재미있는 전시’보다 ‘미감을 키울 수 있는 전시’라는 표현에 훨씬 강하게 반응하고요. 여가 시간을 단순히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나를 배려하고 감각을 채우는 시간으로 활용하는 것 같아요.
┃올가을 국내 여가 트렌드를 예상한다면요?
올해 여름은 사람들이 계절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어요. 여름에는 돗자리를 펴고 햇살을 쬐고 야외 활동도 즐겨야 하는데, 너무 더우니까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죠. 그래서 가을에는 추워지기 전에 자연을 즐기려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요. 올해 들어 ‘기운 충전하러 관악산 간다’는 명당 트렌드도 생겨났잖아요. 명당이라 불리는 산으로 가을 산행을 떠나거나 캠핑이나 글램핑 같은 아웃도어 활동을 즐기는 움직임이 늘 거라고 봐요. 한마디로 ‘추워지기 전에 나가자’가 올가을의 흐름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소도시로 향하는 발걸음도 늘어날 거예요. 주말토리 커뮤니티에서 떠오르는 곳 중 하나는 ‘문경’이에요. 문경만의 색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이 많아서 좋아하는 사람이 많죠.
‘주말 덕후’들이 모인 ‘주말토리’는 관심사와 경험을 기반으로 한 양질의 콘텐츠로 알찬 주말을 보낼 수 있게 돕는다.
┃요즘은 ‘어디로 갈까’보다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를 더 고민하는 것 같기도 해요.
너무 공감해요. 예전에는 관광 명소에 가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었어요. 예를 들면 프랑스에 가서 에펠탑을 보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유명한 곳들을 한번쯤 경험하다 보니 ‘갔다 왔는데 별거 없다’ ‘허탈하다’ ‘남는 게 없다’는 감정도 함께 느끼는 것 같아요. 여행지 자체보다 그곳에서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고, 얼마나 만족했는지를 중시하게 됐죠. 전에는 ‘가성비’를 이야기했다면, 요즘은 시간을 내서 그곳에 갔을 때 얼마나 만족감을 얻는지를 따지는 ‘시성비’를 중요하게 여기는 흐름이에요. 다들 워낙 바쁘게 살고 있잖아요. 일도 해야 하고 부업이나 재테크도 해야 하니까요. 그러다 보니 여가 역시 시간 투자 대비 얼마나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이런 변화가 소도시 여행의 인기와도 연결될까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강릉의 안목해변이나 부산의 해운대처럼 유명한 곳에 가서 정해진 맛집과 관광지를 도는 게 정석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국룰’이라고 하는 코스를 몇 번 경험하다 보니 그곳에서 얻는 만족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거죠. 사람도 너무 많고요. 그래서 차라리 사람이 적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지역 구석구석을 찾아가는 거예요. 유명한 장소를 ‘찍는’ 여행보다 내가 실제로 만족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여행을 선호하게 된 거죠.
┃올가을 추천하고 싶은 국내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공주 여행을 추천하고 싶어요. 건물이 대부분 낮아서 가을 풍경을 보며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 다니기에도 좋아요. 자연과 제철 음식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소도시라는 점에서 추천하고 싶죠. 저희가 구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가 ‘제철’이거든요. 회사에 다니다 보면 계절을 제대로 즐기기 어렵잖아요. 가을이 왔네 싶다가도 정신 차려 보면 어느새 겨울이 되어 있고요. 그런데 그 계절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주말이라고 생각해요. 공주는 가을 하면 떠오르는 밤으로 유명한 곳이잖아요. 알밤 체험을 할 수도 있고, 직접 수확한 밤을 가져올 수도 있어요. 밤을 주재료로 한 디저트 가게도 많아 밤 아이스크림이나 밤 푸딩처럼 정말 진한 가을의 맛을 즐길 수 있고요.

┃주말을 잘 보내는 것이 삶에는 어떤 영향을 줄까요?
주말을 잘 보내는 것은 삶의 새로고침, 리프레시라고 생각해요. 저는 주말에 몇 시에 일어나고, 무엇을 먹고,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할지 스스로 설계해요. 그렇게 주체적으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정말 리프레시가 되죠. 그리고 주말에 열심히 놀면 조금 힘들더라도 다시 일할 에너지가 생겨요. 놀면서 얻은 영감을 일에 적용할 수도 있고요. 반대로 일을 열심히 하고 나면 주말이 더 반갑고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하죠.
┃주말 계획은 어떻게 세우는 게 좋을까요?
저는 엄청나게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주말은 주도적으로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 ‘자다 일어나니 벌써 11시네’도 물론 좋지만, ‘내일은 늦잠을 자야겠다’ 혹은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동네를 산책해야겠다’처럼 거창하지 않은 계획이라도 세워보세요. 그 시간을 내가 통제하고 있다는 기분을 한 번 느껴보면 좋아요. 직장 생활에서는 쉽게 느끼기 어려운 해방감이 있거든요.
┃AI 시대가 오면서 일하는 시간은 줄어드는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하게 된다고 해요. 앞으로 여가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절대적인 노동시간은 결국 줄어들 거라고 봐요. 그렇게 되면 여가 시간은 늘어나겠죠. 과거에는 다양한 장소,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것처럼 여가의 양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앞으로는 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가 올 거예요. 비용이 더 들더라도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즐긴다든지, 여가 공급자들도 더 높은 질의 경험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 같아요. 결국 더 나다운 시간을 보내게 되는 거죠.
┃‘더 나다운 여가’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예전에는 모두가 같은 것을 하는 표준화된 문화가 있었어요. 같은 헤어스타일에 비슷한 옷을 입고, 모두가 한 달 살기를 한 번쯤 해야 한다는 식의 기준이 있었죠. 그런데 AI가 발달하면서 개인마다 알고리즘이 달라졌잖아요. 이제는 ‘평균’이나 ‘표준화’라는 것이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여가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가 ‘이건 꼭 해야 한다’고 정해놓은 기준에 맞춰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 내 알고리즘에 맞게 스스로 원하는 삶에 맞는 여가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죠. 더 작고, 더 깊고, 더 질적인 여가로 가게 될 것 같아요. 결국 개인화라고 할 수 있겠죠. 주말토리의 비전은 ‘킬링 타임을 필링 타임으로 바꾸는 것’이에요. 아무 생각 없이 쇼츠를 보거나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도적으로 그 시간을 통해 영감을 채우는 것이 필링 타임이죠.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필링 타임을 가질 수 있도록 콘텐츠뿐 아니라 여행 상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여가 생활을 제안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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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김희성
Photographer 김시진